“성경에 의해 확신을 갖지 않는 한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수용할 수 없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으므로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다.”(마르틴 루터)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으면 바르고 건전한 신앙의 극히 작은 부분도 얻지 못한다.”(존 칼빈)
500년 전, 위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가 신앙의 기준을 교회의 권위, 특히 교황의 권위에 둔 것에 항거하여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의 유일한 기준임을 강조하며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사실 인류의 타락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위와 같은 사탄의 속임수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고, 교회의 타락은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신 하나님과 같이 무오한 존재로 세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황권의 대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역사가 J. A. Wylie)
1229년부터 로마카톨릭은 평신도들의 성경 보유 자체를 금지했기에, 신도들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라는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아닌 종교 지도자들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로 인해 중세 암흑시대가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바나바와 바울이 ...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 14:14,15)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그에 반해 초대교회 사도들은 위와 같이 자신들이 일반인과 다름없는 사람임을 강조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주목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있을지라도 근본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진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그렇게 시작했다. 몇 달 새 장로들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온 담임 목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를 비난했던 미리암이 받은 형벌에 대해 기록된 민수기를 읽어나갔다. 단단히 작심한 양 설교자의 입에서는 리더에게 저항하다 파멸한 성경 안팎의 사례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 그것은 설교라기보다는 위협이나 한풀이에 가까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배시간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리였기에 누구도 제지하거나 불만을 터뜨릴 수 없었다. ... 목회자라는 자리는 한국교회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카톨릭의 ‘교황무오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개신교회가 한국에서는 오히려 ‘목회자무오설’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히며 전철을 밟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한국교회 자화상, 기독신문, 2011.11.29)
위의 기사를 통해 오늘날 한국 교회도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 중 첫번째가 사람, 특히 종교지도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을 부인한 채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신앙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아래의 언급처럼,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청지기일 뿐입니다. 결코 성경을 대신하여 신앙의 중심에 설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들은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이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지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찰스 스펄전, '목회자들을 위하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