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율법과 성막
성막에 관한 말씀은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 사이에 나오는데,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일로 시작하여 성막이 완성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내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이 강팍함을 보시고 애굽에 많은 재앙을 내리셨고, 결국 그 마음이 꺾어져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내듯이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서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절대로 우리들을 그냥 내보내지 않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단순히 종교인으로서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하고, 명목상 교인이 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 단계를 지나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고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할 때에는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출애굽기를 읽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왕 밑에서 종살이를 할 때 고통을 견디지 못해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려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내버려두라’, ‘애굽의 종살이도 괜찮다’고 하며 오히려 스스로가 나오기를 거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단의 권세 아래서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사단의 저항도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죄 사함 받기를 사모하고 참된 믿음의 삶을 시작하려 하다가 갑자기 가족으로부터 핍박이나 마음에 두려움이 생겨서 스스로 포기하고 형식적인 교인이 되어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를 통해서 죄와 죽음의 굴레와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편에 서서 사단의 세력인 바로와 애굽 군대와 싸워서 이루신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 광야 생활을 시작할 때 모세의 장인은 모세가 집에 두고 온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그 때 이드로는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재판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범죄함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회답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그를 통하여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사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곧 성막에 관한 계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율법을 어긴 죄인을 위한 것이요 그들이 죄 사함을 받는 곳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2) 죄를 깨달음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는 성막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25장부터 35장에는 하나님이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성막을 만들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 다음 36장부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세움을 받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40장은 그들이 성막을 세우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전체가 성막에 관한 것이지만 앞부분은 ‘만들라’는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니라’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 보시기에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 역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막을 인하여 복주시고 구름으로 성막을 덮으시며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성막에 대해 같은 내용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온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는 앞서 언급한 뜻 외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율법이 없을 때에 성막을 세울 것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율법을 먼저 주시고 성막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막을 통해 율법의 목적과 의미가 밝혀짐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그것이 없을 때에는 죄를 깨닫지 못했던 사람에게 자신의 죄와 죄인 됨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리고 성막은 율법이 옴으로 인해 죄인임을 알게 된 그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의롭게 될 줄 알고 이를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잘 지켜서 하나님 앞에 정정당당하게 나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그 깨달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나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 속에서 고민하다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이 없는 삶을 살다가 율법이 내려오자 그것을 준수함으로써 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서 그들은 의에 이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드러나고 그들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그들의 죄를 깨우치면, 그들은 그 상태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반드시 성막을 통해 죄를 씻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율법이 있으면 성막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율법으로 죄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롬 5;1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 어느 누구도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을 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죄에 빠져있음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와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자, 자신은 죄의 결과로 사망과 두려움, 공허의 노예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를 해결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기에 이제 그들은 오직 하나의 길, 곧 성막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어떠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벗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도 이미 벌거벗고 있었지만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벗은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벗고 살았지만 그 때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자신들이 벗었음을, 죄인임을,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음을 깨닫는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거나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보실 때에, 그들은 벗고 있었지만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벗은 것을 발견하게 되자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죄의 결과 사망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범죄한 사실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숨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일단 죄를 깨닫게 되면 그 죄를 완벽하게 해결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 제사에 관한 말씀을 읽어 보면, 온 회중이나 족장이나 평민들이 죄를 범했을 때에 어떻게 속죄 제사를 드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4장 27, 28절에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죄 제사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깨달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를 범했어도 그 죄에 대해 깨우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속죄 제사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가 범한 죄를 깨닫고 죄에 대한 가책과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을 때에 속죄 제사를 드리고, 이로 말미암아 마음이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속죄 제사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한 후에 죄를 깨닫는 것과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죄를 사함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때가 되어 결국 죄의 결과인 사망에 치닫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죄가 드러남으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저주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