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영국 비자에 대해 도움을 구하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준 적이 있는데, 다른 학생들은 모두 비자를 받았지만 한 학생만 못 받았습니다. 사유를 알아보니 비자법대로 신청하지 않고 자기 판단대로 신청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영국 비자법을 정확히 알려줬는데도 불구하고 그 학생은 자기 판단대로 했다가 결국 떨어져 괴로워했습니다.
세상에는 판단해야 될 일들이 많고, 사람들은 많은 판단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판단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판단이든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른 판단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만, 잘못된 판단은 나쁜 결과를 초래합니다.
창세기에는 우주만물과 인류, 그리고 죄와 불행의 근원 등에 대해 나옵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이란 낙원을 허락해주셨는데, 어느 날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벌거벗은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봅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연약했지만,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한 때부터 연약함은 불행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그들의 모습이 아닌, 그들의 마음의 위치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거짓된 자기 판단에 머물러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이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하나님의 판단 안에 있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결국 그들의 첫 판단이 첫 불행을 만들고,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다른 자기 판단이 인간에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판단은 선악과로 인한 불신의 독성인 것입니다.
그 독성이 인류에게 퍼졌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회와 신앙에 대해 나름대로 각자의 판단을 따라 사는 것을 봅니다. 문제는 그 판단이 참된 판단인지를 확인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자기 판단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게 만들고 결국은 멸망으로 몰고 갑니다. 특히, 신앙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서 자기 보기에 신앙생활 잘 했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하는 등 자기들의 신앙이 괜찮다는 판단으로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자기 판단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무시하는 큰 악인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판단이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의 판단만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고 했고, 요셉도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창 40:8)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해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래 말씀처럼, 주께서 오시기 전 곧 하나님의 판단과 해석을 갖기 전까지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는데에서부터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전 4:5)